▶ 크리스 포먼 칼럼
▶ 샌프란시스코주립대 교수
오래 전, 한국에서 돌아오기 전에 한국을 기억할 만한 기념품을 샀다. 자개 보석상자도 사고, 한국에서 유명한 도자기 찻잔 세트도 사고, 한문으로 명언이 쓰여진 벽걸이도 샀다. 그 벽걸이는 2미터 정도 길이었는데, 장장 2만원 돈이었다. 그때 평화봉사단원이었던 나의 한달 월급과 똑같은 금액이었기에 큰마음 먹고 산 보물이었다. 그런데 나는 벽걸이에 쓰여진 한문의 의미를 정확히 몰랐다. 획획 갈겨 쓴 글씨라고 아내도 모르겠다 하여 뜻도 모르면서 벽에 걸어 놓았다. 대부분의 중국제 벽걸이에 쓰여진 말이 "오래 잘산다"라는 그런 종류의 글인 것처럼 한국에서 산 벽걸이도 그런 종류의 뜻일 것이라고 짐작하였다.
집에 오는 손님마다 벽걸이가 참 특이하다고 하면서 예외 없이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그러면 나는 자세히 읽는 척 하면서 마치 번역이라도 하듯이 말한다. "행복하게 오래 살라"는 말이라고 하면, 그들은 나의 한문 실력에 감탄하곤 하였다.
큰아이가 걷기 시작하면서 장식품들은 높은 선반으로 옮겨졌다. 한국에서 가져온 찻잔도 높은 선반으로 옮겨졌고, 전기 아웃렛들은 테이프로 감추어지고, 문마다 걸쇠를 걸어 잠가야 했다. 호기심에 가득한 어린 아들의 관심에서 벗어날 물건이 없었다. 아끼던 벽걸이를 잡아 당겼는지 밑이 찢어져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아이의 엉덩이를 때려 혼을 내어 주고 찢어진 벽걸이를 테이프로 손질하여 걸어 놓았다.
아이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림을 종이에 그리라고 공책과 크레용을 주었지만 하얀 벽에다 그리기 더 좋아하였다. 벽에다가 낙서를 하지 말라고 하며 아이의 엉덩이에 "매매" 하고 때리는 시늉을 하면 아이는 울먹이면서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면서 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였다. 그러나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그림이 벽을 장식하였고, 아내의 일과중의 하나가 벽에 칠하여진 크레용 마크를 지우는 일이었다.
아이가 3살쯤 되었을 때 자기 이름 쓰는 것을 배웠다. 이름 쓰기를 배울 때 잘 한다고 칭찬을 하여 주었더니, 벽에 그린 자기 그림과 함께 사인을 하기 시작하였다. ‘ZAC’이라는 글자가 식탁 위에도, 벽에도, 옷장 문에도, 차안에도, 심지어는 드라이브 웨이까지도 쓰여져 있었다. 크레용이나 연필로만 쓰는 것이 아니고 못 같은 뾰족한 것으로 이름을 의자나 탁자에다 새기기도 하여 야단을 치곤 하였다.
하루는 일에서 돌아와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데 아끼던 벽걸이에 까만 크레용으로 ‘ZAC’라고 낙서가 되어있는 것이 눈에 띄였다. 그 순간 나는 화를 참지 못하고, "ZACH-A_RY” 하고 고함을 쳐서 아들을 불렀다. 아이는 상황이 심상치 않는 것을 눈치 챘는지 의자 밑으로 숨었다. 눈을 가리고 의자 밑에 숨어 있는 아이를 끌어내어 벽걸이 앞에 세우고, “Zachary, 누가 이렇게 했지?" 하고 물었다. 화가나 있는 나를 한번 쳐다보고 벽화를 한번 쳐다보고는 야단을 맞을까봐 질린 얼굴을 하면서 “No, Daddy” 하는 것이었다. 아이가 거짓말까지 하기에 더욱더 화가 나서, 화를 참지 못하고 평소보다도 더 아프게 엉덩이를 때렸다. 그리고 망가진 벽걸이를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어 벽에서 떼어 둘둘 말아 다락방 정크 박스에 던져 넣어 버렸다.
나의 아들 Zachary는 지금 25살이다. 지금 되돌아보면 왜 그처럼 인내심이 없었는지, 별 것 아닌 것을 가지고 자주 아이를 야단치고, 홧김에 아이를 때렸던 것이 후회가 된다. 얼마 전에 다락방에 올라가서 뒤적거리는데 정크 박스에 잊고 있었던 벽걸이가 눈에 띄었다.
수십 년만에 벽걸이는 우리집 거실에 다시 걸리게 되었다. 방문객이 벽걸이에 쓰인 말의 뜻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전처럼 한문을 읽는 것처럼 꾸미지 않는다. 자랑스럽게 필자 이름 옆에 쓰여진 ‘ZAC’을 가리키며 "내 아들이 세살 때 여기에다 자기 이름을 썼다" 하면서 자랑한다. 시간이 이 아버지에게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를 가르쳐 준 셈이다. 아들의 이름이 사인된 벽걸이는 예전보다 특별한 의미를 가진 채 우리집의 값진 가보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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