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대학 남가주동창회 일을 맡은 분이 2주전 동문회 뉴스레터를 부치느라 LA공항 근처의 우체국에 갔다. 송년모임을 알려야 하는데 시일이 촉박해서 연중무휴인 그 우체국에까지 간 것이었다. 박스 3개에 나눠 담은 우편물은 400통 정도. 우표를 한장씩만 붙여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일이었다. 우체국 직원들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그런 서비스는 없다고 했다.
시간은 밤 10시. “우표 붙이다가 밤새우게 생겼네” 혼자 투덜대는데 뒤에서 “내가 도와드릴까요”라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다보니 40대의 타인종 여성이었다.
“차에 우리 아이들이 있어요. 모두 같이 하면 금방 끝낼수 있을거예요”
그러더니 정말 아이들 댓명을 데리고 와서 우표를 붙이기 시작했고, 혼자 하려면 1시간이 넘게 걸릴 일이 10분만에 끝났다.
“감사의 표시로 커피라도 사고 싶었지만 거절하더군요. 오히려 도움을 줄수있어서 기뻤다는 겁니다. 얼마나 고마웠던지…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평생 다시 만날 일이 없을 사람들과 나눈 10여분의 짧은 경험. 그러나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가슴을 따뜻하게 해줄 경험이다.
젊어서는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라는 말이 듣기 싫었다. 나이든 사람들의 질척거리는 감상 같아서였다. 그러나 나이들고 보니 그보다 적절한 표현이 없다. 2000년 새해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연말이다. 그 340여일을 쉴틈없이 뭔가 하면서 살았는데 돌이켜보면 기억에 남는 일은 몇 안된다. 손과 발, 머리로 하는 우리의 작업들은 생존을 위해 필요하기는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흩어질뿐 기억으로 남는 힘은 없다. 기억의 영역에 심어져 보석처럼 빛나는 경험들의 공통점은 마음이 그 주체라는 점이다. 마음이 열리면서 나와 너 사이의 장벽이 허물어지는 경험들은 특히 오래 감동으로 남는다.
74년 육영수여사 피격사건 직후 중무장한 군인들이 깔려있던 김포공항에 외국인 수녀 한사람이 내렸다. 아일랜드 성콜롬반 외방선교회 소속의 카트리나 매큐 수녀였다. 선교와 봉사를 위해 뒤늦게 간호학을 공부하고 40살이 넘어 한국에 간 이 수녀에게 한국의 첫인상은 으스스했다. 그러나 이후 26년간 그는 한국의 누구보다도 많은 친구들을 만들었다. 결핵·암·나병환자들, 노숙자들, 장애아동들. 90년부터는 강원도의 양로원에서 치매노인들을 돌보는데 “그 양로원에 들어가면 제 명보다 오래산다”는 소문이 날만큼 그의 정성은 지극하다.
소외된 이들의 친구로 평생을 지낸 이 외국인 수녀에게 지난 5일 아산재단 사회복지 공로상이 수여되었다. 상금 300만원으로 양로원 노인들을 위해 김치냉장고를 사게 되었다고 기뻐하는 67살 노수녀의 수상소감은 이런 것이었다.
“이웃과 마음을 열고 진정한 친구가 될때마다 제게 이런 기회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 봉사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그저 좋은 친구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왔을 뿐이지요”
마음을 열면 친구가 생기고, 친구가 있으면 삶이 행복하다는 이 말은 그가 낯선 땅에서 고난 끝에 체득한 진리일 것으로 짐작된다.
열린 마음의 가장 완벽한 표본은 모성이다. 아기가 배고프면 어머니는 젖을 물릴뿐 따지고 계산할 조건이 없다.
작가 박경리씨가 80년대초 원주생활을 시작하면서 들고양이들 밥먹인 이야기를 쓴글을 읽은 적이 있다. 외딴 곳이어서 들고양이들이 주변에 많은데 겨울이 되어 먹을 것이 없으면 모두 집으로 몰려온다고 했다. 보통 10여마리가 밥을 먹기 때문에 정부미를 몇푸대씩 들여놓고 밥따로 국따로 끓여 먹였다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내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한 것은 짜증이 나지 않는 일이다. 밥때가 좀 늦거나 하면 내 방앞에 와서 들고양이들이 울고 아우성인데 그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두근거린다”그래서 아파 누워있다가도 밥을 챙겨주고 나서야 드러누웠다고 했다. 이유는 “생을 받은 모든 것의 가장 큰 슬픔이 배고픔이기 때문”이었다.
생명으로서 다른 생명의 아픔을 같이 느낄때 우리의 닫힌 마음은 열린다. 추운 세상, 추운 마음들이 우리 주위에 많이 있다. 연말이 가기전 시린 마음 하나를 녹여줄수 있다면 허둥대며 산 한해가 아주 허망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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