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언론은 제3세계 독재자들에 대해 지극히 비판적이다. 근본 이유는 가치관 차이 때문이다. 민주주의와 상치되는 독재체재에 대해 미언론이 고운 시선을 보낼 리 없는 것이다. 제3세계 독재자들은 그러나 때로 실제 모습보다도 더 추악하게 비쳐지기도 한다. 특히 반미노선의 제3세계 지도자는 부정일색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사다트 전 이집트 대통령은 한 때 지극히 음험하고 비열한 독재자로 묘사됐다. 사다트가 이스라엘과의 전쟁후 미국주도의 평화협상에 응하고 친미로 노선을 바꾸자 평가가 180도 달라졌다. 하루아침에 ‘통찰력과 소신을 지닌 용기 있는 지도자’로 평가가 변한 것이다.
김정일을 보는 미국의 시각에도 비슷한 변화가 일고 있다. ‘위험천만한 플레이보이 독재자’가 그에게 고착됐던 이미지. 그런 김정일이 어느 순간부터 ‘대화가 되는 상대’로 평가되더니 급기야 ‘극히 이성적이고, 결단력이 있는 인물’로까지 묘사되고 있다. 이같은 평가는 주로 관변에서 나오고 있고 언론은 여전히 유보적 입장이다. 그러나 어찌됐든 김정일에 대한 평가가 너무나도 급격히 달라지고 있어 그렇다면 그동안의 미국의 북한정책은 전체적으로 오류일 수 있다는 추론도 가능하게 하고 있는 정도다. 왜 이처럼 급격히 달라지고 있을까.
조셉 리버맨 민주당 부통령후보가 지난 8월 러닝메이트 지명직후 잠시 구설수에 올랐었다. 1970년에 펴 낸 책 때문이다. 책의 제목은 ‘전갈과 독거미’(The Scorpion And The Tarantula). 소련의 동구지배나 미국의 라틴 아메리카 지배나 근본에 있어 다를게 없다는 내용이다. 이 제목은 냉전을 ‘전갈과 독거미의 싸움’으로 비교해 선과 악의 대결논리를 배제시킨 유명한 냉전 사학자 루이스 핼리의 말에서 인용해 딴 것이다.
냉전이 끝난 오늘날 대다수 미국인은 물론이고 과거 철의 장막에 갇혀 있던 구 소련권 주민들도 ‘냉전은 선과 악의 대결로 인식하면서 자유와 기본권을 억압했던 소련이야말로 악의 화신’으로 보고 있다. 도덕적 판단은 유보된채 냉전을 ‘전갈과 독거미의 싸움’식으로 바라본 게 바로 문제가 된 것이다. 리버맨은 ‘한 때의 잘못된 시각’이라고 해명하고 독재체제에 저항하는 세력을 돕기위해 때로 군사개입도 불사하는 미국의 정책을 굳건히 지지한다고 선언해 불을 껐다.
클린턴 행정부의 북한정책이 묘한 방향에서 펼쳐지고 있다. 인권외교를 기본 정책으로 하는 미국의 국무장관이 (미언론의 표현을 빌리면) ‘1984년’의 저자 ‘조지 오웰도 깜짝 놀랄 정도로 스탈린식 전체주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북한’을 방문해 인권문제는 뻥긋도 하지 않고 돌아와 김정일을 찬양하는 듯한 발언으로 일관하고 있어서다. 말하자면 ‘전갈과 독거미의 싸움’의 시각에서 북한문제에 접근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레이건이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불렀을 때 이 말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강제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에게 격려가 됐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제 알고 있다. 독재자와 협상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가치관의 협상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단지 실수로 김정일의 초상화를 훼손시킨 어린이의 가족을 정치범으로 몰아 수용소로 보내고, 고문하고, 처형하는 체제가 북한임을 잘 아는 미국의 국무장관이 인권문제에 침묵을 지켰다는 것은 미국의 신뢰를 손상시킨 행위다"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평양방문과 관련해 쏟아지는 비난의 주 내용이다. 거기다가 임기말의 클린턴 평양방문설이 불거져 나오면서 그 비난은 더 거세지고 있다. 그러나 클린턴 행정부는 다소의 후퇴기미만 보일뿐 근본정책에는 변함이 없다는 자세다. 이와 함께 새삼 한가지 의구심이 제기되고 있다. 미국은 동북아시아의 경우 오직 현상유지성 안정만 바랄뿐 민주주의 확산에는 별관심이 없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오직 중국견제가 북한정책의 알파이자 오메가로 북한의 인권은 알바 없고 김정일을 새로 파트너로 삼음으로써 가능한한 장기간 미군의 한반도 주둔을 유지한다는 게 클린턴의 한반도 구상이고 이와 관련해 이미 모종의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하는 의구심이다. 닷새밖에 안남은 미대선 결과를 가장 초조히 지켜보는 사람은 김정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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