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전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만족할 만한 대가를 주는 직업을 갖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목표다. 스트레스 받는 취업 면접을 거치지 않고 직장을 구할 수 있음은 좋은 일이다. 일단 취직한 후에는 조직내에서 승진해 올라간다면 더
좋을 것이다.
지난 달에는 면접 절차를 거치지 않고 취직했던 내 경험을 여러분에게 들려드렸다. 이번달에는 조직내에서 너무 빨리 승진하는 것의 장점과 단점에 대한 내 생각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한다.
한 조직에서 승진하는데는 여러 가지 좋고 나쁜 이유가 있다. 그럴만한 능력과 생산성이 있어서 승진하는 게 이상적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부당하게 승진기회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겼다고 느낀다. 물론 거기에는 충성심이 없다거나 협동적이지 않으며 항상 지각하는 등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음에도 승진을 놓친 사람들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마이너리티들은 이러한 경우 차별당했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때로는 너무 빨리 승진하기도 하는데 이럴 때 생기는 문제들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하는 것이다.
내가 에반스턴시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 직책이 ‘시티 엔지니어’였다. 시의 기간시설과 관련된 모든 엔지니어링을 책임지는 국장자리였다. 기획, 건설, 보수유지와 더불어 일반 프로젝트외의 특별 사업을 위한 외부 자금을 확보할
책임이 있었다.
이런 면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시 조직을 거쳐오지 않았으므로 시주민들의 불평, 시의회 의원들의 고집, 시장의 요구, 시의 다른 특성 등에 대응하는 데에 좀 어려움이 있었다.
호랑이굴에 들어가더라도 정신 바짝 차리면 살아남는다는 한국 속담이 내 경우에 들어맞는말이었다고 하겠다. 운이 좋았던 탓도 있다.
내가 에반스턴에 갔을 때 엔지니어링 부서에는 오랜동안 시에서 일했으며
‘시티 엔지니어’직책을 제의받았던 유능한 직원이 있었다. 그가 그 직책을 거부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나는 알고싶었다.
첫달 한달동안 나는 모든 직원과 개인 면담을 가졌다. 그와 면담하게 되었을
때 나는 이 직책이 꽤 좋은 자리인데 왜 거부했었는지 그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는 내게 무척 솔직했다. 두가지 이유로 그리했노라고 대답했다. 가장 큰
이유는 엔지니어링 일을 즐겼으므로 평생 그 일을 하고싶었던 것이며 두 번째 이유는 사람 다루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그다지 잘하지도 못하는 편이라고
밝혔다.
일주일 후 나는 그를 내 사무실로 불러 세가지를 제의했다. 어시스턴트 시티
엔지니어직을 제의했는데 그것은 이미 시장 허락을 받아낸 것이었다. 그 다음은
그에게 시의 모든 엔지니어링 프로젝트를 책임지게 하고 시행전에 최종인가만
내게서 받게 하는 것이었다.
세 번째는 그가 원하는 일과 잘한다고 생각되는 일은 무엇이든 하는 자유를
주고, 그 이외의 일은 내가 모두 맡기로 한 것인데 그런 일들은 어쨌든 행정적인
일일 것으로 생각되었다. 책임이 뚜렷해지고 지위가 확실히 보장되자 그는 정말 일을 잘했다. 또한 엔지니어링국을 효율적으로 이끌어나가는데 필요한 대인관계와 시 행정부와 관해서 아는 것을 내게 모두 귀띔해주었다.
에반스턴 시장은 아주 젊은이였는데 나는 그에게서 경영에 관한 많은 것을
배웠다. 시는 주 고속도로를 관리해주고 비용을 주정부에서 지불받는다. 돈을
지불하기 전에 주정부 엔지니어가 도로검사를 하러 시에 나오게 된다.
주정부 엔지니어들이 내가 주정부에서 일할 때의 친구들이었으므로 검사를
시작하기 전에 그들을 데리고 나가 점심 식사를 사곤 했다. 내 돈으로 점심값을
지불해왔다는 사실을 시장이 어떻게 알게 되었다.
어느날 시장이 나를 불러 내게 개인경비지출계정을 승인한다고 말했다. 이
특권은 극소수에게만 허용되는 것이어서 나는 기분이 좋았다. 그렇지만 그에게
제한 사항이 무언지 물었다. 나는 아직도 그의 대답을 기억하고 있다. “조, 아무런 제한이 없어요. 당신에게 제한을 둘 것 같았으면 이 계정을 주지 않았을 거요. 특권을 남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당신을 믿기 때문에 이를 허용하는거요.” 나는 그 후 이 말을 여러 차례 써먹었다.
나의 그 다음 일자리는 전국 규모의 엔지니어링 자문회사였다. 사실 엔지니어링과 관련된 일이긴 했으나 시정부조직을 경영하는 것과 이익을 추구하는 자문회사를 경영하는 것은 낮과 밤만큼이나 차이가 있었다.
이런 차이외에도 일하는 사람들 유형도 달랐다. 행정부에서 일하는
엔지니어들은 보다 협동적이고 서비스가 강한 반면 컨설팅 분야의 엔지니어들은
보다 전문적이고 직업적이며 대체로 더 이기적이었다.
행정부에서 온 새 교통운수디렉터로서 나는 또 다른 낯선 상황에 처하게 됐다. 그러나 또 다시 다행스럽게도 어려움을 극복하는 길을 찾아냈다.
의사결정에 단호하면서 엔지니어링에 관해서는 자신감을 드러내고, 직원뿐
아니라 손님에게도 공정함을 보이자 서서이 그들의 존경과 신뢰를 얻게 되어 결과적으로 협동해서 일을 잘해내고 회사에 이익을 남기게 되었다.
이 어려운 시기를 넘기는데 컨설팅 비즈니스에 특출한 지식을 가진 젊은 직원 한명이 나를 엄청나게 도와주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최고의 친구로 남아있다. 현재 내 위치가 그를 위해 해줄게 있음을 감사하고 있다.
요령을 결코 터득하지 못했던 것 한가지는 고객들과의 골프였다. 재미를 더
하기 위해 한 홀에 10센트씩 내기를 했다. 고객접대에 수백달러를 쓰면서 몇십센트 따기 위해 그들을 이기는 것은 그다지 현명하지 못하다고 고참 컨설턴트들은 밝혔다.
나는 일리노이주 교통운수국(IDOT)을 1970년 그만두었다. 당시 내 직위는
토목기사(CE) IV였다. 내 임무는 개별건설프로젝트를 책임지는 디스트릭트 레지던트 엔지니어였다.
1985년, 내가 IDOT로 다시 돌아왔을 때 나는 중앙국장에 임명되었는데
직위가 CE VIII로 유례없는 승진을 한 셈이었다. 내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빨리
승진했는가를 이 글에서 말하려는건 아니다. 고속 승진을 함으로써 내가 겪어야
했던 어려움과 이에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밝히려는 것이다.
만약 내가 정상 경로를 밟았다면 그렇게 올라가는데 20년 이상이 걸렸을
것이며 그동안 직책에 요구되는 여러 가지를 저절로 배웠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빠르게 승진하는 바람에 적어도 부임 초기에는 부서 총지휘에 충분히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항상 어려운 시점에서는 나를 돕는 사람이나 사건이 나타나 큰
난관 없이 고비를 넘기곤 했다. 예를 들면 나는 수백만달러의 중앙국 예산을 준비할 만한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수년 전에 소프트볼을 함께 즐기고 맥주를 같이 마셨던 친구가 있었다.
우리는 시카고 그랜트공원 소프트볼리그에서 챔피언을 획득했던 팀의 일원이었다.
승부에 개의치않고 일주일에 한 번씩 경기를 가졌고 팀멤버가 모두 인근 술집에
가서 밤이 되도록 술을 마시곤 했다. 여러분도 술친구를 가지기 바란다. 술친구는 진정한 평생 친구가 되기 때문이다.
그중 한명이 IDOT중앙국 예산책임자가 되었으며 즉각 내 문제를 파악하고
나의 첫 예산 작성을 도와주어 나는 크게 안심했으며 아주 고마웠다.
4년후, 나는 다시 IDOT를 그만두게 되었다. 주지사가 나를 일리노이주 공해통제위원회 위원에 임명했는데 그 자리는 수백명이 갈망하는 자리였다.
특정 업무에 잘 맞지 않는 사람에 대해 말한다면 그건 바로 나였다. 위원회에는 7명의 위원이 있었는데 그 중 4명이 변호사였다. 2명은 대학교에서 환경문제를 가르치는 교수로 오랜동안 위원이었고 나머지 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
위원으로서 주요 임무의 두가지는 (1) 주 환경시행령을 채택할 때 유사입법기관역할을 하는 것이며 (2) 모든 환경문제와 관련된 논란거리가 생겨 판결해야 할 때 유사법원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법에 의해 모든 위원에게 환경법 전문 변호사가 배당되었으며 위원의 수석보좌관역할을 했다. 위원장이 보기에 내가 처음에는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예상되었는지 그녀의 법률보좌관을 지냈던 변호사를 내게 보내주었다. 사실상 위원회에서 내가 가장 훌륭한 변호사를 가진 셈이었다. 그는 나를 도와 위원회 판결을 앞두고 사건을 해석하고 환경법을 분석하는 일을 했다.
내 법률보좌관은 탁월한 법적 안목을 가지고 있었으며 게다가 그의 아주머니뻘 되는 분이주상원의원이어서 크게 도움이 되었다.
이상이 내 직업생활 이야기다. 마이너리티이기에 뒤처지는 일반 경우와 달리
나는 마이너리티이기 때문에 사회적 요구에 의해 더 빨리 승진할 수 있었다.
내가 뛰어났으므로 승진가도를 달렸다며 쉽게 오만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단지 적시적소에 있었던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무언가 제대로 했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다른 사람과 똑
같은 대접을 받으려면 내가 다음에 올 사람보다 더 나아야 한다. 나는 이것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도전을 현실로 받아들였다. 또한 더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 후임자에게 물려줄 준비가 항상 되어있었다. 나는 늘 더 좋은
기회를 의식적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내가 항상 신경썼던 두가지는 (1) 새 업무를 배워나가는 과도기에는 새
직책이 요구하는 일을 감당해내지 못해 내 평판과 신용을 몽땅 망치고 더 이상
다음 승진을 기대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과 (2) 내 개인적 실패가 이 나라의 마이너리티들의 진출에 나쁜 영향을 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내 인생이 미국의 마이너리티 진보에 작으나마 한 몫을 했었으면 하는게 내 강렬한 희망이다.
이중식 (Joseph Yi) 씨는 1940년 10살때 부모님을 따라 미국에와 주로 미국사회에서 전문직업인으로 활동해 왔지만 한인사회 봉사회 이사장을 역임하고 이화여대 국제재단 이사로 활약하는 등 한인사회에서도 많은 활약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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