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접없이 채용된 직장
나는 한 번도 취업면접을 당해본적이 없다. 엄격히 말한다면 면접을 단 한 번 당해본 적이 있으나 그것은 겉치레에 불과한 것이었는데 나중에 이를 설명하겠다. 여러분에게 전하고자 하는 주안점은 내가 어떻게 해서 면접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으며 그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나는 고등학교 다닐 때 여러 가지 일을 했었다. 아마도 이런 경험을 통해 나는 어릴 때부터 일에 대한 고마움, 좋은 직업을 갖는 것의 중요성, 금전에 대한 가치를 인식하게 되었던 것 같다.
아마도 1940년대말 "좋은 시절"에 자랐기 때문에 어릴 때 일한 것에 대해 좋은 느낌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국이 2차세계대전에서 승리해 사회분위기가 낙관적이었다. 남자들은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전쟁에서 돌아왔다.
그들은 열심히 일하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를 줄 수 있는 훌륭한 나라와 경제를 건설할 참이었다.
“구인" 광고가 곳곳에 나붙어 있었으므로 지원만 하면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일거리가 모두 쉬운 것은 아니었으며 급료가 항상 높지는 않았으나 중요한 것은 최선을 다할 각오만 있다면 언제든지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내가 했던 첫 일은 신문배달이었다. 신문 한 부 배달하는데 주중에는 1센트, 일요판은 3센트를 받았다. 신문구독료는 주중에 한부당 3센트, 일요판은 10센트였다. 일주일 구독료가 28센트였는데 그중 9센트가 내 몫이었다. 나는 극히 자그마한 지역의 구독자 24가구를 골라 신문을 배달하고 있었다.
수요일은 수금일이었다. 신문배달 소년이 구독자 가정을 직접 찾아가서 수금을 했다. 내가 얼마나 일을 잘했는가에 따라서 팁이 달라지므로 나는 수금일에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며 문앞에 신문을 던지지 않고 나는 계단을 걸어올라가서 현관문과 철망문 사이에 신문을 넣곤 했다. 사람들은 나의 이러한 수고에 감사를 표했다. 신문값 28센트를 지불하는 대신 22센트를 더 얹어서 50센트를 내게 주곤 했다. 당시 식빵 한봉지가 10센트, 영화 관람료가 7센트였으니 그 금액의 가치가 어느 정돈지 짐작될 것이다.
내가 가졌던 또 다른 일자리는 볼링장에서 볼링 핀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핀을 놓는 자동기계가 발명되기 전에는 핀 보이가 손으로 핀을 주워서 맞는 자리에 놓아야 했는데 정확하게 하기가 힘들었다. 볼링 손님들의 "스트라익" 기회를 높이고 더 좋은 점수를 낼 수 있도록 나는 항상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 핀을 제자리에 놓으려 애썼다. 손님들은 이러한 노력에 보답했다.
한 라인에서 볼링하는 요금이 30센트였다. 손님들이 세 라인 정도를 사용하는게 보통이었는데 90센트의 볼링요금중 핀보이가 갖는 게 30센트였다. 핀보이는 보통 한꺼번에 두 레인에서 일했으므로 두시간 일한 대가가 60센트 정도였다. 정말 힘든 일이었다. 마음좋은 손님들은 끝날 무렵에 볼링 레인 위로 25센트 동전을 굴려 던져 그 끝에서 일하는 핀보이들이 가지게 했다.
나는 흥미롭고 재미있는 일들을 많이 했는데 그것을 모두 이야기하려면 분량이 무척 많을 것이므로 딱 한가지만 더 이야기하겠다. 멋진 디즈니가 보편화되기 전, 시카고에는 리버뷰라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에는 모든 종류의 탈 것과 게임들이 있었다. 나는 어느 여름, 보드게임을 진행시키는 일을 했다.
큰 경사진 보드의 윗쪽에 구멍이 한 개 있는데 그곳에서 공을 굴려내리면 아래쪽 다섯 개 구멍중 하나로 들어가게 되어있는 게임이었다. 아래쪽 다섯 개 구멍은 빨강, 파랑, 노랑, 오렌지, 녹색 등 모두 다른 색깔로 칠해져 있었다. 구멍 밑에는 다시 보드가 있으며 구멍과 같은 색으로 칠해져있고 손님들이 그곳에 25센트 동전을 놓았다.
만약 동전을 맞는 색깔위에 놓았으면 게임을 이기게 되어 큐피인형을 타게 된다. 게임하는 사람의 5분의 1만 운이 좋아야 이기게 되는 것이다. 경영주가 큐피인형 한 개를 사오는 값이 17센트이므로 그야말로 돈을 바퀴달린 통에 긁어모으는 셈이었다.
매니저는 나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틴에이저에 불과했으나 그는 나에게 돈관리를 일임했다. 그는 매 시간마다 매점에 와서 내가 차고 있던 불룩한 현금벨트를 빈 것으로 바꾸어주고 갔다. 그때마다 그는 "일을 잘 했다"라는 식으로 말해주곤 했다. 내가 좀 순진했는지는 모르지만 자신감을 주는 그말 한마디가 나로 하여금 주인을 위해 정직하게, 열심히 일하게 하는 모든 것이었다. 이러한 어릴 때 경험으로 나는 - 금전적인 면은 물론 노력면에서도 - 정직하고 열심이면 신뢰감과 존경을 얻게 되고 궁극적으로 성공하게 된다는 것을 터득하게 되었다. _________________
내가 일리노이대학에 다닐 때 여름 방학에 주 교통부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대학과 주 교통부가 같은 주정부 소속이었으므로 일리노이대학 토목공학과 학생들이 면접을 거치지 않고 자동으로 채용되었다.
훗날, 내가 대학을 졸업했을 때 그 부서에 면접 없이 채용되었는데 그것은 여름방학때 그곳에서 인턴십을 했기 때문이었다. 서머잡이 평생의 실제 직업의 밑바탕이 된 셈이다. 그것도 면접을 거치지 않고 말이다. 아마도 내가 초기에 일을 잘했던 모양이었다. 어느 누군가가 언제 지켜보고 있는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다행스럽게도 교통부에는 젊은 엔지니어를 좋은 경험을 쌓게 하기 위해 여러 부서로 순환근무케 하는 제도가 있었다. 나는 자재국, 건설국, 기획국, 지방도로국 (지방 정부를 관리하는 주정부 부서) 등의 부서에서 일했다.
지방도로국에서의 첫 임무지가 에반스턴시였는데 시 업무를 감독하는 내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시의 지도부가 나를 채용했다. 공식적인 취업지원, 면접 없이 내가 에반스턴시 엔지니어가 된 것이다. 그곳에서 8년간 일하는 동안 시의 기간시설을 건설하고 유지 관리하는 일을 즐겼다.
이 모든 것은 매일 일을 열심히 하고 사고과 행동이 견실하며 자신이 사랑하고 대표하는 것에 기쁨과 영광을 가져다줄 자세가 향상 되어있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함께 일하며 서로 믿고 존경하는 관계로 발전했던 시 부국장이 전국규모의 엔지니어링 자문회사 사장직을 맡게 되어 시청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나에게 그 회사에 함께 가서 고속도로부 책임자가 되어줄 것을 제안했다. 그가 나를 처음 채용했을 때 나는 많은 봉급과 좋은 베니핏을 요구했었다. 그가 내게 두 번째 접근했을 때 나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가 내 필요를 잘 돌보아줄 것임을 내가 알고 있었다. 나는 그냥 "언제부터 내가 일하길 원하는가?"라고만 물었다. 이것은 좋은 시절과 나쁜 시절을 모두 겪으며 함께 일해오면서 항상 정직하고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초월한 여러해 동안 형성된 관계에서 오는 것이다.
4년후 지방 엔지니어링 자문회사가 나에게 파트너직을 제의했다. 그들도 나도 그럴만한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소유주의 한 사람이 됨으로써 회사는 소수인종에게 특별히 할당된 프로젝트를 따올 수 있는 소수민족기업 자격을 갖출 수 있었다. 거기에다 나는 다른 파트너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사업개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내 편에서는 동양적 사고방식으로 자녀들에게 무언가 물질적 재산을 남겨주고 싶었다. 돌이켜보건대 이것은 물론 바보같은 생각이었다. 자녀들이 모두 잘해나가고 부모로부터 금전적인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글이 길어지므로 이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겠다. 따라서 마지막 두 직장 역시 면접없이 얻은 것임을 밝혀두고싶다.
서두에 밝혔듯이 내가 면접을 거친 단 한가지 일자리는 그 면접이 형식적인 것이었다.
그 자리는 연방법에 의해 소수민족 건설회사 및 자문회사들이 고속도로건설분야에서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도우는 주 감독기관 책임자 자리였다. 백인들은 흑인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마찬가지로 흑인들은 백인이 맡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70명의 지원자를 놓고 면접이 시작되었다. 1차 심사 후 그 숫자가 17명으로 줄었다. 2차 관문을 통과한 사람이 다섯명이었는데 그중에 나도 포함됐다. 백인 두명, 흑인 두명 황색인 한명이 남게 된 것이다.
마지막 인터뷰에서의 질문은 아주 간단한 것이어서 나는 대답하기가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끝날 무렵, 면접 책임자가 내게 윙크를 했다. 그 자리가 비록 관리직이었으나 교통부 건설국에 속해있으므로 국장이 되기 위해서는 등록된 전문 엔지니어라야만 했다. 내가 알기로는 나머지 최종 그룹의 네사람은 등록된 엔지니어가 아니었다. 그러나 제도적으로 절차를 밟아야 하므로 교통부는 면접을 실시했고 또한 그것이 법적으로도 옳았다. 이 글의 요점은 매일 매일 일을 잘 하고, 생각과 행동이 일관적이며, 자신이 좋아하고 대표하는 사람들에게 영광과 기쁨을 줄 준비가 되어있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마지막 당부: 항상 당장의 이익을 추구하지 말라; 이것은 여러분의 신뢰감과 지속적인 성공을 잃게 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이중식 (Joseph Yi) 씨는 1940년 10살때 부모님을 따라 미국에와 주로 미국사회에서 전문직업인으로 활동해 왔지만 한인사회 봉사회 이사장을 역임하고 이화여대 국제재단 이사로 활약하는 등 한인사회에서도 많은 활약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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