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퍼마킷의 통조림식품 진열대를 지나갈 때마다 나는 한국전을 떠올리게 된다.
가지런히 진열된 콘드비피해쉬를 보며 나는 당시 일곱 살로 전쟁초기 몇 달을 겪었던 고국 한반도를 생각하게 된다.
콘드비피해쉬는 황금보다 더 귀중한 것이었다. 수완이 좋았던 할머니가 암시장에서 콘드비피해쉬 큰 통조림을 한 개 구해오면 주변사람들을 모두 초청해 ‘미국특식’을 나누어먹었다. 할머니는 그것을 밥과 섞거나 만두속에 조금 넣고 국에 풀어 육수냄새가 나게 했다. 그 냄새와 맛은 나로 하여금 평안함을 느끼게 했다.
이제 로스앤젤레스에 살면서 나는 여전히 콘드비피해쉬를 한 개씩 사온다. 역경 속의 사랑과 신앙의 놀라운 선물로 여기며 나는 기도하며 먹는다.
콘드비피해쉬 통조림은 한국전쟁의 모든 다른 면모처럼 내 뇌리에 뉴스 테입처럼 선명하게 남아있다. 전쟁은 우리 가족의 삶 뿐 아니라 미국에 살고 있는 한인 100만명의 삶을 모두 바꾸어버렸다. 깨어있을 때나 잠잘 때나 우리는 두 한국의 통일과 평화를 소원한다. 토끼모양의 반도인 한국은 근 100년 이상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이름대로 살아가지 못했다.
콘드비피해쉬 한통은 또한 전 세계에 퍼져있는 7천500만 한인들의 운명이 얼마나 오랫동안 미국 외교정책의 영향을 받았는가를 떠올리게 한다. 그것은 1905년 디어도어 루즈벨트대통령이 일본의 한국과 만주 통치를 눈감아주기로 한데서 시작됐다. 그 대신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관여를 간섭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결정은 1910년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화의 발판이 되어 그 후 35년간 한국인들로 하여금 2등 일본시민이 되게 하는 식민지 통치에 놓이게 했다.
일본의 2차세계대전 패배는 한국의 독립을 의미하는 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이 항복하자마자 한반도는 절반으로 쪼개어졌다. 북쪽은 소련, 남쪽은 미국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소련이 사라지고도 한참 지난 오늘날 두 개의 독일이 통일되고 해외거주 베트남인들이 고국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한반도에는 아직도 냉전이 계속되고 있다. 3만7천명의 미군을 포함, 150만 이상의 군인이 한순간의 경보에도 싸울 태세가 되어 있다.
전쟁이 터졌던 1950년 6월25일, 서울은 따뜻하고 청명한 일요일로 나는 교회에 갔다. 함께 갔던 할머니와 어머니, 그 누구도 북한이 수시간전에 남한을 기습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서울대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던 아버지 강주한씨는 풀브라이트장학금을 받아 그해 초에 미시간대학으로 공부하러 가고 없었다. 아버지는 7월10일에 돌아올 예정이었다. 우리는 공항에 입고나갈 새옷을 맞추어놓았다.
월요일, 어머니가 라디오를 들었다. 북한 인민군이 서울을 향해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할머니에게 급히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 할머니는 인근 동대문시장에서 중고품인 미 군복, 스웨터, 재킷, 양말들을 팔고 있었다. 아버지를 다시 볼 수 있을까 걱정되었다.
할머니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어찌할꼬, 어찌할꼬”라며 중얼거렸다. 나는 할머니가 그처럼 나약해지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할머니는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박해받을 것임을 알고 공산주의자들에게서 벗어나느라 북한의 집과 사업체, 친구들을 모두 두고 떠나온 강인한 여성이었다. 증조부(강봉호)는 장로교회 장로로 교회를 17개 설립했다. 할머니는 1945년부터 47년사이에 친척들을 남한에 데려오느라 생명을 무릅쓰고 38선을 여섯 번이나 넘나들었다. 1946년 5월, 세 살이었던 나는 어머니 등에 업혀 할머니 인도하에 38선을 넘었다.
6월28일 수요일 밤, 멀리서 대포 터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소련제 탱크가 도시 한가운데 들어왔다. 비교적 조용한 신당동에서 우리는 곧 북한 인민군을 볼 수 있었다.
어머니와 할머니는 이웃에 공산주의자와 그 동조자가 많은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우리가 결코 의심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동네 위원회를 결성, 사람들과 그 움직임, 활동 등을 추적했다. 집집마다 찾아가서 일할 수 있는 건장한 성인들을 뽑아갔다.
그 무렵에야 할머니와 어머니는 아버지가 미국에 있는 것을 축복으로 여기게 됐다. 그러나 이모부였던 창규씨와 옆집의 송선생이 걱정이었는데 두사람 모두 30대로 북한에서 월남해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우리집이 숨기에 좋은 최상의 장소라 생각했다.
창규 삼촌이 숨었던 곳은 마루 밑이었고 그 위에 꽃무늬 돗자리를 깔았다. 송선생은 천장 대들보위에 기어들어갈만한 공간에 숨었다. 아버지 서재의 벽장을 통해서 그곳으로 갈 수 있었으므로 외부인이 탐지해내기는 어려웠다.
이웃에 수상한 사람이 나타나면 집에 통지하는 게 내 임무였다. 두사람과 교신하는 암호를 정했다. 빨래 방망이를 빠르게 두드리면 위험신호이며 두 번 두드리면 마음놓으라는 뜻이며 네 번 두드리는 것은 식사시간을 의미했다. 자신의 생이 내게 달렸다고 그 두사람이 말했을 때 나는 가슴 뿌듯함을 느꼈다.
시간이 흐르면서 오랜동안 아버지를 볼 수 없을 것임이 분명해져갔다. 아버지의 편지가 끊어졌다. 북한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학교가 문을 닫았고 번쩍이는 은빛의 미군 B-29기가 상공에 나타나 북한군 공장과 보급창을 폭격했다. 폭탄이 떨어지는 동안 나는 퀘퀘한 냄새나는 지하실로 달려갔다. 그곳은 낡은 이불과 베개를 놔두었다. 한 번은 미군 조종사가 부주의로 피난민들이 대피해있던 학교건물을 폭격했다. 많은 민간인들이 사망했다. 한국인들의 목숨은 싼 값이었다.
7월말, 공산주의 학생 3명이 우리집에 찾아와 방을 한 칸 달라고 요구했다. 아버지가 없었으므로 우리는 거절할 입장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식모가 쓰던 부엌 옆방을 주었다.
그들은 모두 여학생으로 나를 방에 초대해 사상을 주입시키려 했다. 공산주의의 장점을 내게 이야기했고 사람들을 ‘동무’라 부르라고 지시했다. 그들은 “악마 미국인--제국주의자 미국인--이 선량한 시민들을 죽이고 있다”며 “인민의 승리”를 예측했다.
“우리는 그 미국놈들을 이같이 죽일 것이다.”라며 대나무창으로 흉내를 냈다. 무척 잔인해보였다.
그 학생들은 내게 혁명가 몇 개를 가르쳤는데 개중에는 “김일성장군가”도 있었다. 꽤 잘 가르친 셈이었다. 아직도 나는 그 노래를 외우고 있으니. 저녁에는 이웃의 다른 위원회와 합세해 미군들에게 총검 가하는 연습을 하는 밤훈련에 참가할 여자들을 모았다.
우리는 그 여학생들이나 북한군이 숨어있는 두 남자를 발견할까봐 항상 조마조마했다. 어느날 오후, 이웃을 수색하던 북한군인이 우리집도 샅샅이 살펴나갔다. 심지어는 지하 방공호에 내려가 베개를 흔들어보기도 했다. 또 한 번은 군인들이 먹을 것을 찾아 집에 왔는데 송선생이 작은 공간에서 몸 위치를 바꾸느라 천장이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나기도 했다.
여름이 깊어가면서 저장해두었던 쌀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이웃 공산주의자와 친척, 친구들과 쌀을 나누어먹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학생들이 쌀을 많이 가져가지 못하도록 집 곳곳의 여러 장소에 있는 작은 독에 쌀을 넣어 숨겼다. 또한 쌀을 작은 주머니에 넣어 왕겨로 만든 베개속에 숨겨두었다. 8월이 되자 보리밥에 유일한 반찬은 배추를 된장에 찍어먹는 것이었다.
입을 통해 전선에서 비관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첫 미군은 일본에서 편히 지내다 공수되어 온 주둔군으로 훈련 잘된 북한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여름이 끝날 무렵 아군은 한반도 남단 일부분을 남기고 모두 잃고 말았다.
9월 들어 고무적인 소식을 듣게 됐다. 미해병대가 온다는 것이었다. 멀리서 대포소리가 우르릉거렸다. 맥아더장군이 이끄는 연합군이 서울을 점령할 것이라고 할머니와 어머니가 말했다. 그 후 연합군은 압록강까지 북진, 한반도를 해방시킬 것이며 우리는 북한에 있는 고향집에 돌아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다.
9월15일, 인천에서의 맥아더장군의 대담한 육해공군 합동작전은 성공적이었다. 2주내에 연합군은 수도 서울의 건물을 점령하고 U.N.기를 그 위에 꽂았다. 의기양양한 서울시민들은 손을 흔들고 박수치며 밖으로 나가 탱크와 짚차를 타고오는 군인들을 맞이했다. 그들의 서울 입성은 추석과 일치해 할머니는 숨겨두었던 쌀로 떡을 만들어 두 경사를 축하했다. 승리가 가까워보였다. 아버지는 미국에서 바로 북한으로 올 수 있게 됐다. 나는 기다림에 가슴터질 것 같았다.
남한군이 38선을 넘어 어머니 고향인 함흥과 인근도시 흥남을 점령했다. 한편 유엔군이 북한 수도 평양을 점령하고 압록강을 향해 북진했다.
갑자기 전세가 바뀌었다. 10월 중순, 중국 “자원”병들이 북한군에 합류했다. 맹공격과 반격으로 연합군이 한 부대씩 후퇴, 크리스마스 무렵에는 중공군이 38선을 넘어내려왔다. 1951년 1월1일, 공산군의 서울공격이 시작됐고 1월4일 유엔군이 서울에서 철수했다.
이번에는 우리도 떠나야 했다. 북한과의 전쟁과 달리 중국과 싸우는 것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북한군이 7개월만에 두번째로 서울을 점령할 무렵인 1월초, 우리는 마침내 떠나기로 결정했다.
나는 어떤 소지품들을 두고갈 건지 곰곰 생각했다. 마치 작은 옷장처럼 생긴 꽃무늬와 거울로 앞부분이 장식된 노란색 보석함을 생각해보았다. 어머니가 그해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것인데 아버지 서재위에 있는 다락에 숨겨두었다. 아마 내가 서울로 돌아온 후 꺼내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우리 가족모두가 함께 탈 차가 없었으므로 같이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와 나는 서울에서 남쪽으로 90마일 떨어진 대전 기차역으로 트럭을 타고 가서 송선생 가족을 만나기로 했다. 누구든지 대전역에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기다리기로 했다. 트럭에는 어른이 앉을 자리가 하나밖에 없었으므로 나는 어머니 무릎위에 앉았다. 할머니와 이모는 다른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직행했다. 우리는 피난민수용소에서 서로 찾아보기로 합의했다. 이모부와 송선생은 무기운반을 돕는 노동자로 징용됐었다.
대전역에서 우리는 부산으로 향하는 ‘해방열차’를 탔다. 지붕위에만 빈자리가 남아있었다. 한 남자가 내 허리를 밧줄로 묶고 다른 쪽을 지붕위에 서있는 남자에게 던졌다. 그는 마치 우물에서 물동이를 길어올리듯 나를 들어올렸다. 어머니는 객차 뒤에 있는 작은 계단으로 올라갔는데 나를 끌어올렸던 젊은 청년이 어머니가 올라오는 것도 도와주었다.
내 생에서 두 번째로 우리는 모든 것을 두고 떠났다. 가진 소지품이라고는 쌀 80파운드와 부엌살림 몇 개, 옷가지 조금이었다. 우리는 열차지붕을 가로지르게 묶여있는 밧줄에 몸과 소지품들을 고정시켰다.
‘해방열차’는 추운밤을 가로질러 달렸다. 시베리아의 찬 바람이 올리브색 미군 담요를 기워서 만든 우리 옷속에 파고 들었다. 얼어죽지나 않을까 걱정되었다. 그러나 다음날 저녁, 어머니와 나는 만원상태의 부산 피난민수용소에서 할머니와 재회했다.
저녁때였다. 사람과 음식냄새가 그득했다. 이불시트와 넝마로 만든 임시칸막이로 한 가족의 기거공간이 나누어져있었다. 어린아이들은 고양이처럼 웅크려서 잤고 어른들은 앉아서 치친 등을 물건들에 기댄 채 졸았다.
할머니는 여늬때나 다름없는 수완을 발휘, 부산에 당도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바구니에 물건을 담고 길거리 행상을 시작했다.
남한 제2의 도시인 부산은 혼잡하고 더러웠다. 수척한 얼굴과 머리에 이를 가진 누더기 옷을 입은 개구장이들이 길거리 어디에나 있었다. 때때로 이들은 껌이나 캔디를 얻을 수 있을까 하며 미군 짚차를 따라가기도 했다. 미군들이 항상 친절한 건 아니어서 이들을 향해 “갓뎀”하고 외쳤다. 아이들은 이 말을 따라했다.
물이 극심하게 부족해서 바다의 소금물로 음식을 해먹은 적도 있었다. 공중 목용탕에서 흘러나온 하수에 빨래를 하기도 했다. 밤중에 빼놓지않고 하는일은 이를 잡는것 이었다.
내가 다닌 피난민 학교는 가마니 조각으로 문을 해단 천막안 교실이었고, 운동장은 진흙 등성이었다. 음악시간에는 국군과 유엔군 의 용맹을 찬양하는 노래를 배웠다. 병원에있는 상이군인 위문 노래도 불렀다.
1953년 7월, 전쟁을 멈추게 하는 휴전협정이 조인되었으나 그때 나는 이미 한국을 떠난 후였다.
1952년 10월, 어느 달밤에 어머니와 함께 작은 어선을 타고 아버지와 재회하기 위해 일본으로 탈출했다. 아버지는 뉴욕에 있다가 맥아더 유엔군 사령부에서 일하게 되어 토쿄에 와있었다.
일본 불법입국 혐의로 체포 수감된 나는 나이 아홉 살에 죄수가 되었다. 상당한 비용을 들여 일본 의회의원의 도움으로 우리는 영주권을 얻었고 안정적인 모습을 갖게 됐다.
토쿄의 미국인 학교에 다니면서 나는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영어를 좋아하게 되었으며 장차 미국에서 여기자가 되는 공상을 가졌다. 노스웨스턴대에서 저널리즘 석사학위를 받은지 며칠 후 뉴욕 로체스터의 ‘디모크랫 & 크로니클’지 기자로 일하게 됐다. 그것은 1963년 여름이었는데 나는 호기심 대상이 되어버렸다. 일을 지시받고 인터뷰를 나갈 때마다 오히려 내가 인터뷰당하곤 했다.
일본에 있던 부모님은 1975년 미국으로 이민와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했다. 조선독립투사들이 조국을 일본속박에서 해방시키려고 성금을 모았던 샌프란시스코가 고향을 떠난 부모들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고향에 가보고싶은 꿈을 이루지 못하고 아버지는 2년전 작고하셨고 어머니도 지난 해 돌아가셨다.
이제 할일은 내게 달다. 나는 아직도 조상들이 살던 집의 녹쓴 열쇠를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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