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무대 누비는 발레리나 니나 아나니 아슈빌리
최근 뉴욕 링컨센터에서 ‘백조의 호수’ 공연을 마치고 공연장을 가득메운 청중으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은 니나 아나나아슈빌리에게 남편은 "대단해, 정말 대단해"하며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언제나 자신의 퍼포먼스에 대해 까다로운 아나니아슈빌리는 왕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백조의 역할과 왕자를 유혹한 흑조의 역할 모두를 해내면서 몇몇 장면에는 만족하지 못했다. 공연 후에도 "연습을 더 오래했더라면 더 나은 피루에트(발끝으로 도는 기교)를 할 수 있었다"며 아쉬워한 그녀는 ‘아메리카발레단(ABT)’의 파트너 줄리오 버카와는 단지 두세번의 리허설을 가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링컨센터의 관중들은 열광했다. 막이 내린후 15분여 커튼 콜을 외쳤고 오케스트라석 위로 끝없이 꽃다발이 쏟어졌다. 비평가들도 마찬가지였다. ‘뉴욕 포스트’는 한쪽 발로 회전하는 푸에트를 32회나 해낸 그녀를 "빛나는 아나니아슈빌리"라고 극찬했다. ‘뉴욕타임즈’ 역시 "머리가 쭈뼛 설 정도로 재치있고 깊이있는 퍼포먼스, 관객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고 보도했다.
남편이자 매니저인 그레고리 바샤츠에게 그녀는 "영원히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부부가 만난 것은 15년전 모스코바로 당시 22세의 아나니아슈빌리는 볼쇼이 발레단원이었고 27세이던 바샤츠는 소련 외교 사절의 일원이었다. 바샤츠는 제네바 SALT 군비회담 대표단의 법률전문가로 참가중 그곳 TV에서 그녀를 보고 발레 팬도 아니었지만 단지 이 무용수를 보겠다는 마음만으로 모스코바로 날아갔다. 그러나 그날 공연에 아나니아슈빌리는 몸이 아파 출연하지 않았다. 실망했지만 바샤츠는 그녀에게 300달러 상당의 대형 꽃바구니와 같은 조지아 공화국 출신으로서의 걱정과 염려, 연락처를 적은 노트를 보냈다. 아나니아슈빌리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위해 전화를 걸었고 이후 둘은 연인이 됐다.
아나니아슈빌리가 발레 이외의 인생사를 기억하는 것은 별로 없다. 13세때 조지아 공화국서 모스코바에 도착한 후 언어문제로 충격을 받아 잠시 시력을 잃기도 했지만 은퇴한 내과의였던 할머니가 조지아어로 쓰인 교과서를 구해준 덕분에 두 언어로 매일 새벽 2시까지, D가 A로 바뀔때까지 공부했었다. 어머니가 발레 학교를 방문하던 것은 기억한다. 어머니는 선생님에게 "잘못하거나 열심히 안하면 말씀해주세요. 다른 재능있는 젊은이의 자리를 낭비할 필요가 없으니까요"라고 말하곤 했었다. 물론 코치는 그렇지 않다고 했지만 어머니가 가고 나면 러시아식 교육법대로 늘 야단치며 더 잘하라고 윽박지르며 가르쳤다.
러시아 발레문화는 기대도 많고 무섭게 훈련시키는 편이지만 아나니아슈빌리는 어느 정도의 긴장감을 즐기고 코치의 호령을 사랑했다. 이런 것들이 자신을 러시아의 위대한 무용유산과 연결시켜주기 때문이다. 그녀의 볼쇼이 코치는 라이자 스트룩코바로, 엘리자베타 게르트의 학생이었고 엘리자베타는 바로 위대한 안나 파블로바를 가르친 폴 게르트의 딸이었다.
1980년 불가리아에서 첫 국제대회에 출전한 아나니아슈빌리는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듬해 볼쇼이가 손을 내밀었다. 열일곱때의 일이었다. 볼쇼이 발레 1982년 독일공연 이틀전 백조의 호수 오데트/오딜 역할을 따냈다. 10대에 해낸 백조의 호수는 바로 그녀 최초의 꿈이었다. 공연은 대성공이었고 사람들은 나중에 함부르크 관중이 13번의 커튼콜을 외쳤다고 알려줬다. 그러나 이후 다시 백조의 호수를 공연하는데는 1년이 걸렸다. 볼쇼이는 그녀가 파트너 안드리스 리에파와 함께 따내는 수없는 금메달과 1986~87년 순회공연의 열광적 리뷰도 좋아했지만 ‘어떻게 그들을 [서방에 뺏기지 않고] 계속 묶어둘 것인가’라는 고민을 안고 있었다.
1988년 리에파가 북미 순회공연서 돌아오지 않자 볼쇼이는 아나니아슈빌리가 파리 축제에 나탈리아 마카로바와 미하일 바리시니코브와의 공연에 초청받았을 때 훼방을 놓았다. 볼쇼이는 그녀에게 점점 적은 역을 맡겼고 외국 발레관계자들에게는 그녀가 춤을 출 수 없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이보다 몇달전 바샤츠와 결혼한 그녀는 무용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갈까 고민했다. 볼쇼이가 아내의 여권을 빼앗고 서방세계에 매우 아프다고 말하자 바샤츠는 아내 이름으로 볼쇼이 단장에게 편지를 썼다. "나에게 자유를 주십시오. 그리고 정상적인 삶-원하는 곳에서 공연하는-을 살도록 해주십시오. 아니면 그만두겠습니다."
뜻밖에도 결과는 좋았다. 볼쇼이 단장이 아나니아슈빌리에게 "좋도록 하고 우리와도 계속 함께 일하자"고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아나니아슈빌리는 현대 국제 무용스타의 모델이 됐다. 러시아 발레에 기반을 뒀지만 미국 ABT, 휴스턴 발레와 계약을 맺고 매해 공연을 가진다. 또 덴마크 왕립발레단, 런던 왕립발레단은 물론 그녀가 이끄는 ‘니나 아나니아슈빌리와 스타들’을 이끌고 전세계의 무대에 선다.
하지만 무용수도 운동선수처럼 최대능력을 발휘하는 데는 한계가 있음을 올해 37세인 아나니아슈빌리도 잘 안다. 부부는 한때 와인산업이 한창이던 조지아 포도밭에 375에이커의 대지를 사들였다. 은퇴를 준비하는 그녀는 예술 감독이 새로운 무용수를 찾더라도 절망하거나 방황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여기에 집과 다목적 아카데미를 세우고자 한다. 정착을 위해선 그녀가 일하는 무용단중 발레 매스터 자리의 유혹을 이겨내야 하기도 하다.
현재로선 너무나 바쁜 일정 때문에 아나니아슈빌리는 휴가를 그리워한다. 하지만 바샤츠는 "제임스 조이스가 ‘춤 먼저, 생각은 나중’이라고 말하던 걸 기억하라"고 다독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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